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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7일, SK하이닉스가 채용 공고를 하나 냈다. 칩 설계, 소자, 연구개발 등 그동안 학사 이상만 뽑던 핵심 기술직에서 당일부로 모든 학력 제한을 철폐했다. 고졸이 와서 연구개발을 해도 된다. 이번에 뽑는 규모는 수백 명, 마감은 6월 23일이다. 생산직 학력 제한도 추후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온 사회가 70년 동안 운명을 ‘학위’라는 두 글자에 걸어온 나라에서, 1위 기업이 학위는 쓸모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회사는 코리아헤럴드 보도에 따르면, 2025년 한국 대학생이 가장 가고 싶은 기업 순위에서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이유는 간단하다. SK하이닉스는 돈을 너무 많이 준다. 지난해 9월 노조와 협약을 맺어 매년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으로 떼어주기로 했고, 상한선도 없다. 2025년 이익 47조 원에 연말 상여금으로 월급의 2964%를 지급했으며, 일반 직원이 손에 쥔 돈이 약 70만 위안(한화 약 1억 3천만 원)에 달한다. 2026년 1분기 영업이익률은 72%로 엔비디아보다 높다. 이 기세로 연말까지 가면 1인당 상여금이 300만 위안(한화 약 5억 6천만 원)을 돌파할 가능성도 있다.
SK하이닉스 직원은 한국 결혼 시장에서 이미 의사, 변호사 등 전통적인 고소득 직업과 동급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결혼정보회사 관계자가 언론에 전한 바에 따르면, 반도체 슈퍼 사이클에 진입한 이후 예상을 뛰어넘는 수입을 올리는 엔지니어들이 변호사보다 인기가 많아졌다고 한다.
코리아헤럴드가 전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 누군가 SK하이닉스 노조 점퍼를 4만 원에 올리면서 상품 설명에 ‘소개팅 전투복’이라고 네 글자를 적었다. 게시글은 순식간에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
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하이닉스 직원이 소개팅에 나가면 겸손하게 자기는 삼성 다닌다고 말한다. 인성이 좋은 상대를 만나야만 사실은 하이닉스에 다닌다고 실토한다는 것이다.
삼성은 정말 피를 흘리고 있다. 넉 달 동안 최소 200명의 엔지니어가 하이닉스로 이직했다. 옮긴 사람들은 수입이 3.5배 뛰었다고 말한다. 삼성 노조 위원장이 기자 앞에서 이 숫자를 말할 때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삼성은 같은 액수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은 덩치가 너무 크다. 반도체가 엄청나게 돈을 번 같은 분기에도 휴대폰과 가전은 여전히 적자를 보고 있었다.
SK하이닉스가 학력 제한 철폐를 발표할 때 내놓은 설명이 있다. AI 시대에는 학력만 볼 수 없고 창의력과 잠재력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사고력, 적응력, 공감력이라는 세 가지 단어를 꺼냈다.
다 좋은 말이다.
70년 동안 닦아온 외나무다리
한국은 전 세계에서 ‘학위’라는 것을 가장 극단까지 밀어붙인 나라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5세에서 34세 한국인의 71%가 대졸자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수능 날에는 항공기 운항 경로가 조정되고, 증시 개장이 늦춰지며, 경찰차가 지각한 수험생을 호송한다. 한국인이 유독 지식을 숭배해서가 아니라, 대학 합격증이 한국에서는 거의 비자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밑바닥에서 중간층으로 올라가는 비자 말이다.

그것 없이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 그것이 있으면, 적어도 줄은 설 수 있다.
이 비자가 어떻게 이렇게 중요해졌는지 알려면 60~70년 전을 돌아봐야 한다.
박정희 시대, 한국은 경제의 명줄 전체를 몇몇 대재벌에 묶어 놓았다. 삼성, 현대, LG, SK. 이들은 가장 돈 되는 사업을 차지하고, 가장 높은 임금을 주며, 가장 튼튼한 철밥통을 보장한다. 중소기업이 줄 수 있는 월급은 재벌의 60% 수준이다. 노동력의 81%가 중소기업에서 일하지만, 모두의 눈은 재벌의 1%도 안 되는 자리를 향해 있다. 한국에서 한 졸업생의 첫 직장은 평생 소득을 거의 결정짓는다.
재벌에 들어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대학 학위, 그것도 좋은 대학 학위다.
온 나라의 가정이 이 하나의 길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국은행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비슷한 재능을 가진 학생이라도 부모의 경제력이 명문대 합격 확률에 미치는 영향이 무려 75%에 달한다. 서울대 신입생의 3분의 1이 서울 출신이며, 강남 3구만 해도 12%를 차지한다.
한국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수저 이론’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집안 재산이 20억 원이 넘으면 금수저, 5천만 원 이하면 흙수저라 부른다. 한국인의 70~80%는 계층 상승이란 게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인터넷에 자기 집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요지는 이렇다. 우리 엄마는 작은 식당을 하며 1년 내내 쉬지 않고 10년을 일해 내 대학 등록금을 모았다. 나는 지방의 눈에 띄지 않는 대학에 갔고, 문과였다. 지금은 카페에서 서빙을 하며 월급 180만 원을 받는다. 여동생이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데, 나는 대학 가지 말고 기술이나 배우라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반대하셨다. 엄마가 말하길, 바로 우리가 배운 게 없어서 이렇게 사는 거라고.
한국의 지방 소도시에는 이런 가정이 널려 있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작은 읍내에서 학원 불빛은 밤 11시까지 꺼지지 않는다. 문밖으로 나서면 거리엔 사람 하나 없고, 편의점 점원조차 졸고 있다. 열여섯, 열일곱 살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 대해 아는 전부는 휴대폰 화면에서 나온 것들이다. 부모는 매달 학원비로 수십만 원을 보낸다. 작은 식당이나 치킨집을 하는 가정에 이 돈은 말 그대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다. 그런데도 보낸다. 보내지 않으면 아이가 외나무다리에 줄을 설 자격조차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치킨집 가설’이라는 말로 자조한다. 지금 뭘 하든, 프로그래머, 건축가, 엔지니어, 결국 마지막은 치킨집 사장으로 끝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재벌의 자리는 정해져 있고, 그 자리에 서지 못한 사람은 언젠가 떨어져서 똑같은 곳으로 수렴된다. 지방 청년들이 이 가설에 가장 크게 공감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자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추락 속도가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서울에서 산다는 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옥이다. 하지만 서울에 가지 않으면 어떨까? 지방의 취업 시장은 지옥보다도 더 고요하다. 너무 고요해서 지옥조차 이곳을 썰렁하다고 느낄 정도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간다. 서울로 비집고 들어가 고시원에 산다. 그 방은 침대보다 조금 더 클 뿐이고, 칸막이는 너무 얇아 옆방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며, 공용 화장실은 복도 끝에 있다. 낮에는 수업을 듣거나 면접을 준비하고, 밤에는 스탠드 불빛 아래서 토익 단어를 외운다. 스물서넛의 젊은이들이 4평짜리 칸막이방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대기업 구직자’라는 입장권을 모으기 위해서다. 학력, 영어 성적, 자격증, 인턴 경험, 봉사 활동. 한국인들은 이 모든 것을 ‘스펙’이라고 부른다. 게임에서 캐릭터에 능력치를 부여하는 것과 똑같이, 모든 항목에 시간과 돈을 써서 올려야 한다.
70년대, 80년대에는 엄마가 옳았다. 그때는 온 사회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같았고, 학위는 엘리베이터 표였다. 사기만 하면 따라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멈춘 지 오래다.
젊은이의 71%가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을 때, 학위는 더 이상 네가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니라, 네가 밑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이다. 모두가 가지면, 아무도 가지지 않은 것과 같다. 진짜로 사람을 거르는 것은 학위 위에 덧붙여진 부가물들이다. 해외 교환 경험, 교외 대회, 인맥 추천, 면접 학원. 하나하나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외나무다리가 여기까지 오자, 다리 위를 걷는 것은 아이들이고, 다리 밑에서 떠받치고 있는 것은 집안의 재산이다.
다리를 허무는 사람은 다리 반대편에 서 있다
SK하이닉스가 말했다. 다리는 건너지 않아도 된다. 고졸도 와서 칩 연구개발을 할 수 있다. 종이 쪼가리가 아닌 능력을 보겠다고.
나는 이 일을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려 했다.
학위를 안 본다면,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회사는 성장 잠재력,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 문화 적합성 같은 단어들을 꺼냈다.
수능 점수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전국 단일 기준이다. 이 기준이 조잡하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성장 잠재력’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어떤 형태인지, 면접관이 정한다. ‘문화 적합성’은 더욱 모호하다. 거의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지방 소도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한 아이가 SK하이닉스 이천 캠퍼스 면접장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경상북도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차로 세 시간 거리다. 그의 고등학교에는 반도체 실험실도, 코딩 동아리도 없었고, 도서관에 칩 관련 책은 10년 전에 출판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똑똑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웨이퍼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준 적이 없다.
이제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한 시간 안에 그에게 ‘유연한 사고’가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이 판단은 그가 말하는 모습, 문제를 사고하는 태도,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어떤 기질에 의존한다. 이런 것들은 재능과 관련이 있지만, 더 큰 부분은 어떤 공기 속에서 자랐는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디를 가봤는지, 그리고 낯선 사람 앞에서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 법을 누군가 가르쳐줬는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면접 학원은 문을 닫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커리큘럼만 바꿀 뿐이다. 장사는 영향받지 않고, 오히려 더 잘될 수도 있다.
옛 규칙은 딱딱하지만 명백했다. 점수가 되면 되는 것이고, 누구도 이유 없이 너를 떨어뜨리지 못한다. 새 규칙은 부드럽고, 품위 있으며, 선의로 가득하다. 하지만 부드러운 자일수록 휘기 쉽고, 어느 쪽으로 휘느냐는 누가 그 자를 쥐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10년 동안 식당을 해서 딸을 대학까지 보낸 그 엄마. 그녀의 손에 쥐어진 카드는 단 하나, 바로 그 학위다. 그 종이쪼가리에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 카드 게임에서, 그녀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카드이기 때문이다.
강남구 아이들은 이 카드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코딩을 배우고, 여름방학이면 실리콘밸리에 가며, 방과 후 활동표는 세 페이지나 빼곡하다. 학위 따위는 상관없다. 같은 카드가, 어떤 사람에게는 전 재산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장식품이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어, 테이블에서 가장 먼저 치워진 카드가 공교롭게도 가난한 사람의 유일한 카드다.
새로운 외나무다리
SK하이닉스의 학력 제한 철폐는 채용 효율만 놓고 보면 좋은 일이다. 회사 역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리며 HBM 주문이 2년 뒤까지 밀려 있어, 당장 일할 사람이 절실하다. 고등학교 졸업자가 정말로 칩 설계를 할 수 있다면, 그 앞을 가로막던 규칙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SK하이닉스는 한국 대학생 1지망 회사다. 이 회사가 학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순간, 이 말은 학교 담장을 넘어 모든 학원가에 울려 퍼질 것이다. 아직도 책상 불빛 아래서 문제를 풀고 있는 모든 고등학생이 1초간 흔들릴 것이다.
한국에는 이미 반도체 특성화 고등학교가 있다. ‘한국반도체마이스터고’라는 곳이 최근 첫 입학 설명회를 열었는데, 사람들로 가득 찼다. 3년 배우고 나와 하이닉스 생산 라인에 발을 들이면, 1년에 버는 돈이 아버지가 평생 번 돈보다 많을 수도 있다.

같은 달, 통계청 데이터에 따르면 5월 취업자 수가 전년 동월 대비 4만 명 감소하여 17개월 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제조업 취업은 23개월 연속 감소했다. 반도체만 오르고 있고, 다른 업종은 모두 떨어지고 있다.
새로운 외나무다리가 놓였다. 다만 이번에는 다리 저편이 대학이 아니라, 한 회사다.
대학이 아무리 경쟁이 치열해도, 그래도 수백 개의 학교가 있고 전공도 수천 개라 방향은 다양하다. 만약 다음 세대 한국 젊은이들의 모든 도박이 ‘좋은 대학 가기’에서 ‘좋은 회사 들어가기’로 바뀐다면, 그들은 여전히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며, 단지 돈을 거둬가는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다.
하이닉스는 학력을 안 본다고 말하고, 삼성에서는 4만 명이 돈을 나누라며 파업을 벌이고 있다. 두 가지 사건을 합쳐야 하나의 사건이 된다. 이는 학력 제도의 자기 혁신 같은 것이 아니다. 돈이 너무 막강해서, 이익 앞을 가로막는 제도는 모두 비켜서야 하는 것이다. 규칙은 돈을 따라간다.
그 강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수십 년 동안 그 위에 놓인 다리는 여러 번 바뀌었다. 과거제도, 수능, 대학 학위, 그리고 이번에는 ‘종합 역량 평가’다.
그 강은 재벌과 중소기업 사이의 60%에 달하는 임금 격차이고, 서울과 지방 사이에 전 세계 하나가 통째로 놓인 자원 격차이며, 금수저와 흙수저 사이의 그 선이다. 태어날 때 이미 용접되어 굳어버린 선이다.
유미리는 『JR 우에노역 공원 출구』에서 한 남자를 썼다. 그는 후쿠시마 시골에서 도쿄로 올라와 1964년 올림픽 경기장을 지었다. 힘을 팔고, 집으로 돈을 부치고, 불평하지 않고, 멈추지 않으며, 요구받은 모든 일을 했다. 경기장이 완공되자 도쿄는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는 마지막에 우에노 공원 벤치에서 잠들었다. 그의 곁에는 그가 벽돌을 날랐던 바로 그 경기장이 있었다. 사람들은 산책하러 오고, 사진 찍으러 온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했던 일들이, 끝난 그날 더 이상 필요 없어졌을 뿐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작은 식당을 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는 오늘 분명 SK하이닉스 뉴스를 봤을 것이다.
내 생각에 그녀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여동생은 아마도 여전히 대학에 갈 것이다.
그녀가 몰라서가 아니다. 알고 있지만 차마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인정하는 순간, 앞서의 10년이 허사가 된다. 1년 내내 쉬지 못했던 그날들, 1원의 이익마저 둘로 쪼개 쓰던 그날들, 자신이 열이 나도 가게 문을 닫지 못했던 그날들, 모두 딸에게 그 종이 한 장을 쥐여주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 종이가 정말 중요하지 않다면, 그녀가 했던 그 모든 일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녀는 계속해서 뒷바라지하고, 계속해서 돈을 모으고, 계속해서 학원비를 보낼 것이다. 고시원의 그 4평짜리 칸막이방에, 그녀의 작은딸도 언젠가는 들어가 살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