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미국 중간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글로벌 기술·산업 지형을 재편하고 있다.
민주당은 텍사스, 조지아 등 핵심 주에서 주지사 선거를 승리했고, 일부 후보는 데이터센터 건설에 대한 중단령(모라토리엄) 시행을 명확히 약속했다. 이 결과로 시장에서는 AI 인프라 확장 전망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아시아 반도체주는 수요일 전반적으로 하락했고, 미국 국채 금리는 이에 따라 내렸으며, 나스닥 지수는 최근 한 달간 누적 약 8% 조정을 받았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 이번 선거 결과의 영향은 희비가 엇갈린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제조사는 데이터센터 규제가 강화되면 서버용 D램과 고대역폭 메모리(HBM) 수요가 억눌릴 것을 우려하는 반면, 한화솔루션 등 한국 태양광 기업은 민주당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청정에너지 세액공제 정책을 복원해주기를 기대하며 그 수혜를 바라고 있다.
데이터센터 반발 확산에 기술주 압박
이번 중간선거에서 데이터센터 반대파의 승리 규모는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텍사스주는 GLJ리서치 추정 기준 2030년까지 미국에서 가동에 들어갈 데이터센터 용량의 약 4분의 1을 차지한다. 민주당의 지나 이노호사(Gina Hinojosa)는 공화당 현직 주지사 그레그 애벗(Greg Abbott)을 꺾고 30년간 이어진 공화당의 주정부 우위를 끝냈다. 같은 당 후보인 제임스 탈라리코(James Talarico)도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조지아주에서는 상업용 부동산 서비스 기업 CBRE 데이터 기준 애틀랜타가 전미에서 데이터센터 착공 규모가 가장 활발한 시장인데, 민주당의 키샤 랜스 보텀스(Keisha Lance Bottoms)가 주지사 자리를 차지하며 20년 넘게 이어진 공화당 집권을 마감했다.
주목할 점은 데이터센터에 대한 반감이 단순히 당파적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론자들은 데이터센터가 소음을 일으키고 용수 사용량이 많으며 전력 소비가 막대하고, 주민 전기요금까지 끌어올리는 반면 창출하는 일자리와 세수 기여는 주정부가 제공한 인센티브에 걸맞지 않다고 비판한다. 일부 공화당 인사들까지 이런 사업에 반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머스크는 이번에 공화당에 4억5,000만 달러 넘게 기부했으며, 선거 당일 밤 소셜미디어에서 "데이터센터를 우주에 짓는 것도 꽤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농담했다.
유럽 최대 자산운용사 아문디(Amundi) 산하 투자연구기관의 수석 투자전략가 에이단 야오(Aidan Yao)는 "우리가 보기에 이번 중간선거는 트럼프에 대한 국민투표라기보다 AI에 대한 국민투표에 가깝다"며 "AI 테마가 어떤 제약을 받게 된다면 미국 경제와 미국 인플레이션, 미국 통화정책 모두 극도로 불확실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반도체업계: 반도체법 보조금은 지켜도, 데이터센터 신규 규제는 부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서 민주당의 의회 장악은 상반된 신호를 보낸다. 긍정적인 면은 민주당이 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법(CHIPS Act) 보조금 삭감 시도를 견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 최종 확정된 보조금 조건을 재협상하려 해왔고,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이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삼성전자가 텍사스 테일러 공장 투자와 연계해 받는 보조금은 최대 47억4,500만 달러에 이른다.
그러나 데이터센터 규제가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업계 소식통에 따르면 시장의 우려는 AI 안전, 전력 및 환경 문제를 이유로 데이터센터 건설 인허가가 까다로워져 신규 프로젝트 착공이 지연되고, 결국 서버용 D램과 고대역폭 메모리 수요가 발목 잡히는 데 집중돼 있다.
KB증권 권희진 애널리스트는 규제 강화가 반드시 투자 규모 축소로 직결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데이터센터는 지방 세수와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커 주정부가 곧바로 건설을 금지하기는 어렵다"며 "보다 가능성이 높은 조정 방향은 전력 비용을 데이터센터 운영사에 전가하거나, 자체 전력 확보를 전제로 착공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빅테크는 변전소와 송전망, 발전설비를 직접 지어야 해 전체 인프라 지출이 오히려 늘어날 수 있고, 이는 한국 전력기기 제조사에 새로운 수요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다.
자동차업계: 관세 장벽은 유지될 듯
자동차 업계는 정책 완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무역확장법 제232조에 따라 시행되는 15% 관세는 행정부 권한에 속해 의회를 어느 당이 장악하든 유지될 전망이다. 조성대 한국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의회의 정부 정책 집행에 대한 견제가 다소 강화될 수는 있지만 관세 조치가 크게 바뀔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말했다. 그는 워싱턴이 자국 산업 보호와 공급망 공고화에 계속 초점을 맞추는 상황에서 자동차 관세와 대미 생산 확대 압력이 이어질 것으로 봤다.
다만 민주당의 의회 장악이 전기차 보급 정책에 새 동력을 불어넣어 현대자동차와 기아가 전동화 행보를 더욱 깊게 가져갈 수 있다.
조선업: 협력 프레임은 이어지겠지만 여지는 제한적
조선업의 핵심 변수는 미국이 자국 해군 함정의 해외 건조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느냐다. 하원을 통과한 국방수권법(NDAA)은 해외 조선소에서 전투 함정을 건조하는 데 자금을 투입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반면, 상원 군사위원회 버전은 일부 비전투 함정의 해외 건조를 허용한다.
신한증권은 미국의 해군 함정 해외 건조 제한 입장이 더 강화되면 MASGA, 즉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를 통한 신조선 수주 기대는 좁아지고, 협력 기회는 정비·보수, 모듈 공급, 현지 조선소 등으로 집중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미국 조선업 재건이 양당의 공통 인식이고 MASGA 투자도 행정부가 주도해 추진하는 만큼, 전반적인 협력 프레임은 유지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재생에너지: 정책 순풍에 한국 기업 수혜 기대
재생에너지 업계는 이번 선거 결과를 가장 낙관적으로 본다. 민주당이 IRA 청정에너지 세액공제 복원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만큼, 미국에 대형 생산기지를 둔 한화솔루션 같은 기업이 수혜 기업으로 꼽힌다. 태양광 섹터는 특히 기대를 모은다. 한국 기업이 이를 통해 유리한 시장 지위를 확보하게 됐다.
대미 사업 확장 속 한국 기업, 의회 정치 동향에 촉각
한국 기업이 의회 권력 구도 변화에 이토록 민감한 이유는 대미 사업 비중이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기업 데이터 제공업체 CEO스코어가 28개 대기업집단의 해외 자회사를 조사한 결과, 올해 6월 말 기준 미국 자회사는 1,308개로 10년 전의 394개보다 232.0% 증가했고, 전체 해외 자회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3.0%에서 26.5%로 뛰었다.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한화의 미국 자회사 수는 같은 기간 240개에서 888개로 늘었다. 한화는 태양광과 에너지저장 사업의 대대적 확장에 힘입어 63개에서 374개로 가장 큰 증가폭을 보였고, SK가 40개에서 243개로 뒤를 이었으며, 현대자동차는 55개에서 112개로 늘었다.



